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문단 편집) === 초기 === [[1917년]] 9월 11일에 일로코스 노르테 지방의 사라트(Sarrat)라는 마을에서 변호사이자 하원의원이던 아버지 마리아노 마르코스[* Mariano Marcos, 1897~1945. 2차 대전 동안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미 육군 소령 로버트 레이펌([[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Lapham?wprov=sfla1|Robert Lapham]])이 이끄는 필리핀 게릴라 루손 게릴라 무장군(LGAF)에게 [[거열형|두 팔을 물소에 묶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방법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와 교사이던 어머니 호세파 에드랄린[* Josefa Edralin, 1893~1988. 남편과 달리 아들이 물러난 후에도 2년을 더 살다 죽을 정도로 장수했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르디난드는 [[화교]] + [[일본계]] + [[일로카노인]] 혈통에 상당히 교육을 잘 받은 인물로, [[마닐라]]에서 공부하다가 1930년대 후반 마닐라시 근교에 있는 필리핀 대학교에 진학해 법률을 전공했는데, 대학에서는 계속해서 수석을 차지했고, 후술할 재판을 받지 않았다면 계속 수석을 차지했을 거란 얘기가 있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마르코스는 실제로 1939년에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을 때 평균 점수가 거의 만점이라는 92.35%를 차지하며 전체 '''1등'''으로 합격할 정도로 영리했다[* 이런 좋은 머리 때문인지 마르코스는 실제로 긴 연설을 좋아해서 20~25페이지짜리 연설문을 '기억 속에서' 낭독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마르코스는 필리핀 역사상 가장 높은 변호사 시험 점수를 받은 사람은 아닌데, 실제로는 1954년 변호사 시험에서 평균 96.7%를 기록한 플로렌츠 레갈라도(Florenz Regalado, 1928~2015) 전 대법관이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참고로 레갈라도는 구제법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1986년에는 현 필리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행정부 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38년 12월에 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훌리오 나룬다산(Julio Nalundasan, 1894~1935)을 1935년 9월 20일에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기소 내용에 따르면 이 살인 계획에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 2명도 관여했으며, 나룬다산의 집의 열린 창문에서 나룬다산의 등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바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본인이었다고 한다.''' 증거가 명백했기에[* 마르코스는 실제로 필리핀 대학 소총 팀의 일원이자 전국 소총 챔피언이었으며, 마르코스의 라이플이 필리핀의 예비 장교 훈련단 무기고의 총기 선반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달리 필리핀 대학 소총 팀 리더가 쓰던 라이플은 사라져 있었고(심지어 후자의 총이 바로 '''범행에 사용된 총이었다.'''), 결정적으로 모든 피고인 중 이 무기고에 접근할 수 있던 사람이 마르코스밖에 없었다.] 마르코스는 삼촌 1명과 함께 1939년 11월에 계획적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참고로 아버지와 다른 삼촌은 법정 모독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독학한 법률지식으로 스스로 변호하면서 대법원에 상소하여 1년 뒤인 1940년 10월 22일에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필리핀에서 꽤 인기를 얻어서 정치인이 될 중요한 자산을 얻게 된다. 이후 [[마닐라]]에서 법정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르코스는 [[필리핀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다가 교전 중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 악명높은 [[죽음의 행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일본]]에 맞서 게릴라전의 핵심지도자로 활약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훗날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게릴라 항전을 벌이던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마르코스가 항일 게릴라전을 했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20대 초반이라, 나중에 8,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는 주장과 겹치면 뭔가 석연찮게 된다. 스탠리 카노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오히려 친일 혐의로 아버지가 마을 사람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출처불명이다. 적어도 필리핀 육군에 [[장교]]로 입대해 참전한 것까지는 확실하지만 포로로 잡힌 이후의 행방이 묘연하다. 1980년대에 마르코스 정권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이걸 폭로한 책이 출간되었고,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마르코스는 실제로는 1942~45년 항일투쟁에 전혀 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참여했더라도 형식적으로만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코스는 생전에 자신이 항일활동으로 전쟁 중에 33개의 훈장을 받았다고 자랑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중에 수여받은 훈장은 단 2개뿐이었으며, 그것도 마르코스의 상관들이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그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자유당(필리핀)|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써 승승장구했다. 주요 정치 경력을 거치고 상원의장이 된 마르코스는 전임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마카파갈이 이를 부정하고 재선에 출마하자 마르코스는 당적을 바꾸어 [[호세 라우렐]]의 [[국민당(필리핀)|국민당]]에 입당하였다. 국민당에 입당하자마자 마르코스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1965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